돌하르방 이야기①
(Dolhareubang story1)
JEJU
Story
제주도의 오리지널, 진짜 돌하르방은 단 48개뿐이다.
(There are only 48 original, real Dolhareubangs in Jeju Island.)
제주도를 대표하는 ‘(유형의) 상징’이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제주도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아마도 많은 분들께서 '돌하르방'을 떠올리시지 않을까요? 처음 도착하는 공항에서부터 도로, 식당, 관광지 등 어디에서나 쉽게 발견할 수 있고, 집 서랍 어느 구석에는 누군가 여행선물로 준 돌하르방 열쇠고리 하나쯤은 있을 테니까요. 언제가부터 돌하르방은 제주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제주도 돌하르방은 언제부터 제주도에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그 역할이나 의미는 무엇일까요?
제주도가 1970, 80년대 대표적인 신혼여행지로 유명했던 시절 돌하르방의 코는 아들을 낳게 해주는 영험이 있는 존재로 인기가 있었답니다. 지금도 코 부분만 반들반들해진 돌하르방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구요. 그렇다면 돌하르방은 누군가의 소원이나 바람을 들어주는 신앙적 존재였을까요? 제주도 곳곳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것은 마을이나 공동체를 지켜주는 제주민들의 오래된 전통신앙의 유산이었기 때문일까요? 제주도를 일컫는 말 중에 ’18,000신의 고향’이라고 할만큼 제주에는 수많은 신들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돌하르방이 이 18,000 신의 한 부분이었다는 내용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답니다. 돌하르방을 모시는 당(제주 마을 곳곳에는 신을 모시는 신당들이 많이 남아있다)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 돌하르방은 조선시대 제주로 부임해온 제주목사(지금으로 따지면 제주도지사) 김몽규에 의해서 1754년경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것도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 등 도성 입구에 세워졌고 제주목의 동, 서, 남문 입구에 각 8개씩 24개, 대정현, 정의현의 동, 서, 남문 입구에 각 4개씩 24개가 만들어진 것이 전부입니다. 이렇게 진짜 돌하르방은 모두 48개뿐입니다.
만약에 돌하르방이 제주전통 신앙의 역할을 했다면 처음 만들어진 이후에도 마을 여기저기에 만들어졌을 터인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1971년 제주민속자료로 지정되어 보전되기 이전에는 돌하르방이 관리조차 되지 않아 제주도 곳곳으로 흩어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1기는 아직까지도 행방을 찾지 못한 채 유실되고 말았으니 돌하르방이 그다지 큰 대접을 받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돌하르방은 성문 입구 양쪽에 세워져 성의 수문장 혹인 수호신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서울에서 파견된 제주목사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했던 조선시대 관리가 토속신앙의 영향처럼 보이는 석상을 성문 입구에 세웠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분들도 계시리다 믿습니다. 어떤이들은 전통신앙이 강한 제주민들을 이해하는 관점에서 만들었다고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제주목사가 토속신앙을 미신이라 탄압하고 파괴하기에 바빴는데 김목사는 조금 달랐는지는 모를일 입이다. 어쨌든 돌하르방은 육지에서 온 관리에 의해 만들어진 성문을 지키는 상징적인 수호신의 역할이었을 뿐 성안에 사는 제주민들에게는 그다지 영향력을 주는 존재는 아니었음을 짐작해 봅니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48기의 진짜 돌하르방이 잘 관리되지 않았음이 이를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요. 제주 돌하르방을 육지의 ‘장승’과 비교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심지어 돌하르방을 설명하는 안내판에도 장승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고 되어있답니다. 육지의 장승은 보통 마을 입구에 세워져 그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했고, 많은 곳에서 그 지역민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고 믿어져 왔던 존재 입니다. 하지만 돌하르방의 경우는 제주민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그들에 의해 믿어져왔던 존재도 아니었습니다. 18,000 이나 되는 신들의 명단에 돌하르방신은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의 개인적인 생각은 돌하르방과 장승은 조금 다른 성격이라 아닐까 싶습니다.
돌하르방이라는 친숙한 이름 역시도 1970년대 제주도 민속자료로 지정되면서부터 만들어진 이름입니다. 원래는 옹중석, 우석목, 벅수머리 등 다른 이름으로 불리던 것이 외부인들 특히 관광객들에게 친숙하고 쉬운 이름인 돌하르방으로 정해진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측면에 수백, 수십만년 전부터 만들어진 제주의 자연과 구, 신석기 유물도 많이 발굴되는 제주도에서 18세기 육지것에 의해 겨우 48개 만들어진 제주 돌하르방이 지금 제주도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은 조금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상상력이지만 돌하르방이 지금처럼 관광객들에게 잘 알려진 이유는 아마도 70년대 신혼여행객들을 가이드하던 이야기 만들기 좋아하는 어느 택시기사님의 ‘돌하르방 코와 아들에 관한 스토리텔링’이 만들어낸 효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돌하르방 이야기②
(Dolhareubang story2)
JEJU
Story
제주돌하르방이 3종류가 있다고?
(Are there three types of Jeju Dolhareubang?)
또 한가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돌하르방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알고있는 돌하르방의 이미지는 바로 이것일겁니다.. (좌측 돌하르방사진)
작은 피규어나 열쇠고리로 만날 수 있는 제주 돌하르방의 일반적인 이미지 입니다. 하지만 이 것은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의 3곳의 돌하르방 가운데 제주목 돌하르방의 모습이며 정의현(지금의 성읍 민속마을 인근)과 대정현(지금의 대정읍 추사거적지 인근)의 돌하르방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는 사실을 아시는 분이 얼마나 될까요? 여러분은 알고 계셨나요?
(우측 위: 정의현, 우측 아래:대정현)
제주여행을 꼼꼼히 해본 사람이 아니라면 이 돌하르방을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성읍민속마을을 다녀왔거나, 추사 김정희 기념관 인근을 방문했던 여행객들도 이 낯선 돌하르방의 모습을 쉽게 지나쳤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저 역시 제주도로 이주해오기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제주 도지사의 명령으로 각각의 성문 앞에 세워졌을 돌하르방이 너무나 상이한 이미지라면 담당 관리는 큰 문책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제주시에서 대정읍이나 성읍까지의 커뮤니케이션 조차 쉽지 않았음은 자명하겠지요. 돌하르방을 만들었을 석공은 각기 다른 사람이었을 것이고, 간단한 가이드라인을 제외하고는 해당 석공의 상상력을 더해 제작되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3곳의 석상의 이미지는 이처럼 다른 개성의 돌하르방이 탄생할 수 있었을 겁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제주목의 돌하르방은 좀더 위엄이 있어 보입니다. 부리부리한 눈, 커다란 코와 굳게 닫은 입에는 부드러움이나 친근함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반면 대정현의 돌하르방의 모습은 동그란 얼굴형과 부드럽고 친근한 눈과 입의 모습에는 위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귀여운 모습이며, 정의현의 돌하르방은 상대적으로 심플한 디자인에 무심한 듯한 모습이 시크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이처럼 각각의 위치에 따라 비슷한듯 다른 형태의 돌하르방은 하나씩 찾아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잘 보존된 성읍민속마을의 12기와 대정읍성의 12기는 원래의 위치로 다시 잘 복원이 되어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만 제주성에 있던 24기는 여전히 제주시내 여러곳에 흩어져 있다는 것은 많이 아쉬운 부분입니다.
개인적으로 제주도내에 있는 모든 돌하르방을 직접 찾아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대정현과 정의현의 돌하르방은 원래 위치 근처로 잘 옮겨져 있어서 찾아보기 어렵지 않았지만, 제주시에 있는 21기(24기 중 2기는 서울 국립박문관에 있고, 1기는 행방불명이다)는 제주시청(2), 관덕정(4), 제주목관아(2), 삼성혈(4), 제주민속사박물관(2), 제주KBS(2), 제주대학교(4), 돌문화공원(1) 등지로 뿔뿔히 흩어져 있고 심지어 각 소유권마저 나눠져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몇몇 뜻있는 분들이 제주목의 돌하르방을 원래 위치로 복원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고 계신줄 알지만 각각의 소유권자들의 이해관계 등으로 쉽지는 않아보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각각의 소유권자들마다 돌하르방을 보전하고 관리하는 정도가 다르고, 심지어 제주시청의 돌하르방은 울타리나 경계마저도 없이 거의 방치되어 있는 수준이니, 제주도민속자료에 대한 관리 수준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3곳의 돌하르방 중에서 제주성의 돌하르방이 전체 크기도 다른 곳들보다 클 뿐만 아니라 최초 만들고자 했던 제주목사 김몽규의 의도를 가장 잘 표현한 돌하르방일 겁니다. 제주도에서 가장 큰 성인 제주성의 출입문을 지키는 수문장이자 수호신인 석상에 권위나 위엄을 주고자 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대정현과 정의현의 돌하르방이 더욱 특별해 보입니다. 육지것의 의도와는 다르게 현지인의 자연스런 취향이 더해질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가정집의 돌담(집담)을 절대 높게 쌓지 않고 누구나 들여다보며 서로 돕고 살았을 그들에게 높게 쌓인 성벽은 부자연스러웠을 것이고, 굳이 무서운 얼굴을 하며 성을 지킬 이유도 없지 않았을까요? 기회가 된다면 지금 제주도의 흔한 돌하르방 기념품들을 대정현과 정의현의 친근한 모습으로도 만들어보면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그나저나 제주성의 잃어버린 돌하르방 1기는 어디에 있을까요?
제주도 무덤이야기①
(Jeju Island Grave Story1)
JEJU
Story
제주에서는 무덤 주변에도 돌담(산담)을 쌓는다
(In Jeju, stone walls (sandam) are also built around graves.)
제가 2011년 제주 이주 후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걸어서 제주도를 한바뀌 도는 것이었습니다. 425km의 올레길을 통해 많은 마을길, 밭길, 오름길을 혼자 걸으며 제주의 속살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한달여의 기간동안 제주섬의 신기하고 다양한 모습을 보았지만, 단연코 궁금한 것은 제주도의 오름과 밭 가운데 놓인 '무덤'들이었습니다.
'관광객' 시절에는 이것들이 무덤인지조차 알지 못했기에 더욱 신기한 형태의 무덤양식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무신론자에다가 공동묘지 등 무덤이라면 낯설음을 지나 약간의 무서움마저 느끼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주의 무덤은 너무나 신기한 모습이어서 궁금증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장 신기한 것은 무덤의 봉분 주변을 에워싼 돌담이었습니다. 넓이가 1미터 정도, 높이는 허리높이 쯤 되는 정교하고 반듯한 4각형의 돌담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한줄로 대충 둥그렇게 쌓아놓은 돌담이 간혹 만날 수 있습니다. 무덤 주변의 담을 '산담'이라 하고 무덤을 '산'이라 부른다는 것을 배운고 왜 제주에서는 무덤에 산담을 쌓는지를 알게 된 후부터는 더이상 제주의 무덤이 무섭거나 불편하지 않게 되었습니다.육지와는 다르게 굳이 무덤 주변에 산담을 쌓은 이유는 우선 주변에 방목되어 있는 소나 말들이 무덤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고합니다. 후손되는 입장에서 조상님의 무덤 위에 소나 말들이 올라가 풀을 띁고, 똥을 싸는 것을 용납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제주의 오름은 마을이나 집안의 공동묘지의 역할 뿐만 아니라 소와 말들을 방목해 키우는 목장의 역할도 함께 하고 있었답니다. 또한 이른봄 오름에 불을 놓아 병해충을 죽이는 과정에서 조상의 묘까지 불에 타지 않도록 산담이 방호벽의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능적 이유와 더불어 제주민들의 사후 세계에 대한 세계관이 더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을까 싶습니다. 무덤 주변의 돌담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의 집담과도 같이 돌아가신 분의 영역이자 집인 것입니다. 산담은 사방을 둘러 돌을 쌓지만, 오른쪽이나 왼쪽(돌아가시 분의 성별에 따라 위치가 정해진다고 한다) 앞 부분에 '신문(혹은 시문)'을 만들어 영혼이 드나들 수 있도록 문을 만들어 두기도 했습니다. 돌아가신 후에도 자신의 집 울타리(산담)을 만들고 드나들 수 있는 신문을 만들어 편하게 지내시라는 후손들의 배려였을 것입니다. 산담의 규모, 정교함 등의 형태는 물론 후손들의 경제적, 사회적 형편과 위치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은 굳이 제주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돌아가신 분의 무덤은 살아있는 후손들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수단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제주의 산담 양식도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물론 우리나라의 화장 문화의 확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전히 전국적으로 최하위의 화장률(2019년 기준 75.4/ 전국 평균 88.4%)이지만 빠르게 올라가고 있습니다(2016년 대비 11.4%/ 전국 평균 6.9%) 이로 인해 개별 무덤의 산담을 쌓은 비율도 줄어들고, 각 지역별 공동묘지 들이 생겨나면서 전통적인 현무암의 산담이 없어지고 심지어 시멘트, 콘크리트로 모양만 낸 산담마저 등장하고 있습니다. 얼마전 구좌읍의 동거미 오름을 가보니 오름 정상부분의 몇몇 무덤들이 이장을 위해 파헤쳐져 있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역시 모든 생활, 문화 양식은 시대에 따라 변화할 수밖에 없나봅니다. 어쩌면 몇십년만 지나면 제주만의 독특한 산담이 있는 무덤을 보기 어려워질 수도 있지 않을까 아쉬운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제주도 무덤이야기②
(Jeju Island Grave Story2)
JEJU
Story
제주 무덤에는 어린아이 모양의 '동자석'이 있다
(There is a child-shaped stone in the tomb of Jeju.)
사람들이 관심도 없는 무덤 관련 이야기를 자꾸 하게 됩니다만 저 역시 도시에서 이주를 한 사람으로 왜 제주의 무덤에 이렇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가끔은 우습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정말 독특한 그리고 무엇보다 무섭거나 음습함과는 거리가 먼 친근하고 정감가는 요소들이 있는 제주 무덤에 대해 자꾸 공부를 하게 되고 여러분들께 소개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보통의 오래된 육지의 무덤을 가보면, 특히 위세가 좀 있는 집안이라면 무덤의 봉분 양쪽에 위엄을 갖춘 돌로 된 석물(문석인, 망주석 등)들이 세워져 있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그 석물들은 무덤에 어울리는 위엄을 갖춘 모양새가 기본입니다. 하지만, 제주의 무덤 내 석물 만큼은 특별하고도 재미있습니다. 어린아이 모양의 석상이 양쪽에 마주보고 서있고, 그 양손에는 무엇인가 하나씩의 '기물(동자석이 들고있는 문건)'을 들고 있는 모슴을 볼 수 있습니다. . 이것이 바로 제주 돌문화의 대표적 상징인 '동자석'이랍니다.
동자는 말그대로 '어린아이'를 말합니다. 그럼 왜 무덤 주변에 어린아이 모양의 석상을 배치했을까요? 앞서 말씀드린대로 제주민들은 무덤을 돌아가신 분의 또다른 공간(집이나 가정)으로 인식하고 있고, 그래서 담을 쌓고, 드나들 수 있는 문을 만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어린아이 모양의 동자석을 통해 돌아가신 분의 심부름도 해주고, 말동무도 하라는 역할을 있던 것은 아닐까요? 육지의 동자석은 조선시대인 15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했고, 제주에는 그보다 늦은 17세기에 조선의 유교 사상과 함께 제주의 장묘문화에 함께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제주 최초의 동자석은 1632년 제주에서 많은 말을 키워 한양 조정으로 진상을 해 벼슬을 얻었다는 헌마공신 김만일의 무덤에 있던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육지의 동자석은 거의 볼 수 없음에도 제주에만 독특하게 남아, 그것도 제주만의 독특한 문화적, 종교적 색채가 더해져 새로운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특히 제주의 강한 전통신앙(무속신앙)은 물론 불교, 기독교적 요소까지 더해져 동자석에 표현되었다고 합니다. 동자석이 손에 들고 있는 '기물'은 돌아가신 분이나 그 집안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숟가락, 젓가락, 주걱, 술병, 술잔, 창, 칼, 새, 꽃, 부채, 십자가까지 정말 다양한 물건들이 기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여러번 이야기가 되겠지만, 섬에 갇혀 폐쇠적인 제주민들이 아니라 바다밖의 다양한 세력들의 문화와 자신들의 생활을 융통성있게 자신들만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제주 사람들의 포용성의 상징이 동작석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혼자 해보곤 합니다.
역시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제주 문화의 소중한 한 부분이기도 한 제주 동자석은 그만큼의 대접을 받고 있지 못합니다. 제주 최초의 동자석이라는 김만일 묘의 동자석은 두번이나 도굴이 되어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찾지도 못하는 실정이라니 우리의 무관심이 어느정도인지 한심하기도 합니다. 제가 몇년전에 한창 제주 역사, 문화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하던 시절 이러한 사실을 알고 검색을 해서 제주 동자석을 판매하고 있는 대구의 골동품상과 통화를 한적이 있었습니다. 육지의 동자석보다도 훨씬 비싼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었고, 판매자는 아주 당당하게 제주에서 온 진짜 동자석이라며 1쌍(2개)에 180만원을 요구했었습니다. 제주의 어느 누군가의 무덤에 있었을 것을 누군가 도굴을 해 버젓이 판매를 하고 있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어디선가는 여전히 제주동자석들이 비싼 가격에 팔려 어느 가정집 정원에 주인을 잃은채 놓여져 있을겁니다. 저는 주로 가는 올레길이나 오름에 있는 동자석의 위치를 알고 찾아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그 자리에 있던 동자석이 없어진 것을 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어쩌면 여전히 누군가 도굴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입니다.
작은 손에 꽃을 들고 빙삭하게(빙그레의 제주어) 웃고 있는 동자석을 어느 골동품상이 아닌 제주 오름의 산담에서 만나길 바래봅니다.